어제 작성한 지난 리뷰에 급 탄력을 받아, 줄곧 쓰려고 시동만 부릉부릉 걸어뒀던 렌즈 리뷰를 드디어 시작해보려고 한다. 러시아의 거리계 카메라용 렌즈는 주피터 시리즈나 인더스타 시리즈가 가장 유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이즈 콘탁스를 카피한 Kiev(Киев), 라이카 바르낙을 카피한 Zorki(Зоркий)에 사용한 렌즈가 대부분 주피터와 인더스타 시리즈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오리지널리티가 출중한 Russar(РУССАР)며 자이즈의 Topogon을 싸고 좋게 만들어준 Orion-15(ОРИОН-15) 등등 흥미진진한 렌즈가 매우 많다. 오리온과 루사도 결국 수중에 들이긴 했지만, 오늘은 비교적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1978년에 발매된 HELIOS-103 렌즈를 리뷰해 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리뷰를 시작하기 전 헬리오스라는 이름에 대해 잠깐 짚고 넘어가 보려고 한다. 헬리오스 렌즈의 라인업은 SLR 카메라 용 렌즈가 대부분이다. 그 중 Helios-103이 잔존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RF바디용 렌즈인데, 애초에 주피터 50mm 시리즈를 대체하고자 만들어졌다고 하니 당연히 주피터 시리즈보다는 역사가 깊지는 않다. 헬리오스 라인업의 또 다른 RF 렌즈로는 헬리오스-94 50mm f1.8 렌즈가 있다. 이 렌즈는 특이하게도 콘탁스 마운트의 외경통에 장착이 되어 마치 SLR 렌즈 같은 형태로 보인다. 한번 재미로 써볼까 하는 마음에 이리저리 알아봤는데 매물도 정말 없거니와 상태가 좋은 렌즈는 더더욱이 없기도 하고, 특정 Киев 바디에서만 장착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있다고 해서 결국 마음을 접었다.
우선 렌즈 외관부터 살펴보자. 렌즈 디자인의 대부분의 구성요소가 직선으로 쭉쭉 뻗어있어 툰드라의 드넓은 기개가 느껴지는 듯하다. 조리개 조절링이 블랙으로 되어있어 마운트부의 실버 부분과 대비되어 단단한 느낌이다. 하지만 느낌과는 다르게 조리개 링 위쪽부터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었는지 보기와는 다른 조작감을 제공한다. 고질적인 문제인지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사용하고 있는 렌즈는 조리개 링이 렌즈 몸체와 약간의 유격이 있어 덜컥거리는 느낌이 있다. 코팅이 되어있기는 한데 코팅 색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약하게 되어있다. 초기 러시아 렌즈들에 보이는 'П' 코팅 표기도 없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원가 절감의 흔적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렌즈 안을 들여다보면 무코팅 렌즈와는 다르게 매우 투명한 느낌이다. 조리개 날은 9매이며, 필터 사이즈는 40.5mm이다.
앞서 언급한 렌즈 외관에서 검정 파트가 왠지 마음에 걸려 결국 벗겨보기로 결심했다. 실버로 깔맞춤을 하고 싶기도 했고, 왠지 80년대 느낌이 나는 렌즈를 20살 정도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하고 싶었다. 검정 도장을 제거하고 보니, 황동에 크롬 코팅이 된 마운트 부분과 알루미늄으로 되어있는 조리개 링 부분이 묘하게 차이가 나서 좀 더 싸구려 느낌이 나는 것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상대적으로 고급진 조나와 테사옆에 배치해보니 네임링이나 조리개 값이 표기된 폰트 등등이 매우 조잡해 보인다. 하지만 그 닳고 닳은 느낌이 사진에도 묻어 나올 것만 같아서 볼 때마다 작업의 만족도가 굉장히 높다!
이쯤에서 렌즈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짚고 넘어가 보고자 한다. 이 렌즈의 구조는 비오타 구조이다.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비오타 렌즈는 M42 마운트의 비오타 58mm 렌즈이다. 혹여나 비오타라는 이름이 익숙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느 때인가 엄청나게 유행했던 회오리 보케렌즈로 유명했던 헬리오스 44-2 렌즈가 바로 비오타 58mm의 카피 렌즈이다. M42 버전과는 구조가 아주 살짝 다르지만 콘탁스 마운트의 비오타 렌즈와는 거의 비슷한 렌즈 구성을 보이고 있다. M42 마운트의 비오타 75mm f1.5를 카피한 헬리오스 40-2 85mm f1.5역시 굉장히 유명하다. 언젠가는 유니콘과 동급인 '4와4분의1 센티미터' 비오타를 꼭 써보길 바라옵고 기원하며 이제는 헬리오스-103의 결과물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첫 번째로는 코이로 어댑터와 라이카 바디의 조합의 0.7m 보케의 결과물이다. 헬리오스 44-2나 40-2를 써본 적이 없어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44-2처럼 어지럽지 않은 선에서 적당한 회오리 느낌이 나서 조나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지난 리뷰에서 언급했던 후지논 55mm f1.8 렌즈도 비오타 구조이다. 두 결과물을 비교해도 헬리오스-103의 보케의 회오리 느낌이 적다. 비오타 구조는 대부분 조리개를 기준으로 대물 렌즈 쪽 렌즈군의 크기가 더 큰 편인데 헬리오스의 경우는 그렇게 차이가 크지 않아서 그렇지 않나 무책임한 추측만 해볼 뿐이다. 1.8 조리개가 결코 작은 편이 아니어서 조금만 가까이 가더라도 매력적인 보케를 만나 볼 수 있었다. 특히 초점이 흐려지는 바로 뒷부분의 배경의 주파수가 클수록 좀 더 오밀조밀한 보케가 나와서 배경이 너무 멀어지지 않게 촬영하곤 했다.
위 사진들이 배경을 좀 더 먼 곳으로 배치했을 때의 결과물이다. 아무래도 보케가 좀더 커지고 시원한 맛은 좋아지는데 비오타 구조만의 매력이 줄어드는 느낌을 받았다.
소니 미러리스 + 헬리코이드 어댑터 조합을 사용하면 대략 30cm 내외의 초점도 가능하다. 하지만 대부분 렌즈가 그렇듯 이쯤 되면 배경이 너무 뭉개져서 구분이 어려워진다. 위와 똑같은 이야기이지만 비오타 구조의 매력도 반감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억지로 만든 보케의 경우도 크기가 커져서 플라나 구조의 결과물과 구분이 어려웠다.
대략 1m의 보케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배경과의 거리에 따라 느낌이 각각 다르지만 극 주변부가 화면 안쪽으로 말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회오리치는 흐림이 더해져 중앙부의 주제를 부각하기 좋았다. 인물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이었다면 바스트 샷으로 1m 즈음의 초점을 가장 많이 사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다음으로는 전반적인 화질에 대해 언급해 보고자 한다. 최대 개방에서 비네팅은 당연히 좋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비관적인 추측에 비하면 좋은 편이었다. 극 주변부의 비네팅의 범위는 넓지만 어두워지는 정도는 심하지 않았다. 그보다 놀란 것은 왜곡이었는데, 근거리에서 조차 거의 왜곡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대칭 구조는 그래도 어느 정도 근거리에서 볼록 왜곡을 피할 수 없다는 경험에 의한 개똥철학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쓸데없이 왜곡에 민감한 나로서는 너무나도 좋았다. 전체적인 선명도는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사실 나의 취향 기준으로 중앙부 해상력은 이쯤이면 충분하고, 주변부가 좀 더 무너지는 느낌이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이전에 리뷰한 캐논 35mm f1.5 렌즈처럼 주변부로 갈수록 무너지는 디테일이 있었다면 좋았을 듯 하다. 대문에 은행나무 낙엽이 꽂혀있는 초점면이 평면인 사진도 좀 더 입체적으로 보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이 렌즈는 화질과 가격 사이의 가성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베희 기준, 정말 말도 안 되게 비싸 봐야 70불이 되지 않고 적정한 가격이 대부분 50불이어서 취향이 맞고, 콘탁스용 어댑터가 이미 있다면 최고의 명기가 아닐까 조심스레 평을 해본다.
빛 번짐, 플레어, 글로우 까지 반가운 얼굴들이 모두 쉽게 쉽게 모습을 비춘다. 옅은 코팅 때문인지 빛이 잘 통제되지 않을 때는 컨트라스트가 확 무너지게 되어 도리어 대비를 높이는 보정을 하게 되는 경우도 생겼다.
실내에서는 갑자기 무언가를 벗어던진 듯 컨트라스트가 한 칸 더 내려간다. 대부분 언더 노출로 찍어 대비를 줄이고 조금씩 노출을 올리는 보정을 하는데 실내에서는 거의 대비를 줄이지 않아도 만족스러웠다. 앞서 언급한 플레어를 맞거나 빛이 들이쳐서 컨트라스트가 무너지는 경우와는 또 달라서 신기할 따름이었다. 거의 사용한 지 3년이 다되어가는데도 이 렌즈의 온전한 능력을 파악하지 못한 느낌이다.
앞서 언급한 글로우 측면을 좀 더 살펴보자. 배경 흐림의 글로우도 좋았지만 초점면 앞으로 흐려지는 부분은 더욱 글로우에 취약했다. 거기에 빛까지 들이치는 상황이라면 정말 안구에 습기가 찬 느낌마저 들었다. 오버해서 이야기해보자면 초점 맞은 주제를 좀 더 부각하여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하는 느낌이 좋았다.
화질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로는 '조리개를 조이면 선명합니다!' 코너이다. 건들면 부서질 것만 같던 이미지는 힘세고 강한 능력자가 되어 돌아온다. 플레어, 고스트 마저 잘 억제된다. 아직 조리개를 조여 선명한 사진의 매력을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할 따름이다. 반대로 종이장만큼 얇은 사진 실력을 렌즈 개방 특성에만 희석하여 '그래도 이만큼은 찍습니다~'라고 으스대고 있진 않은지... 내일은 거울 앞에 서서 반성하는 시간을 갖도록 해야 하겠다. 2년이 훌쩍 넘는 기간 동안 조리개 조인 사진이 단 3장이라니...
렌즈를 입수한 시기는 공교롭게도 코로나19가 창궐하던 때였다. 그때쯤 아기가 태어났는데 아무래도 밖에 나가지 못하다 보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실내에서 마음에 쏙 드는 결과물을 내주었기에 이 렌즈로 간간히 아이가 커가는 과정을 담아두었는데, 오늘 리뷰하면서 한 곳에 쭉 모아보니 기어 다니지도 못하던 것이 언제 이렇게 뛰고 걸어 다니는지 만감이 교차하게 되었다. 물론 가장 간편한 핸드폰 카메라로는 수백 장이 찍혀있어 지금까지의 과정이 빽빽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렇게 단 몇 장의 사진으로 그동안 커온 과정이 압축되니 감회가 매우 새롭다. 항상 조나와 심라에 밀려 제습함에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가끔씩 의미 없더라도 집에서 이 렌즈로 커가는 과정을 쭉 담아보는 것도 신나는 프로젝트가 되겠다는 기대로 이번 리뷰를 마친다.
※ 러시아 렌즈 리뷰 :
2019.02.25 - [손안의 도구] - Jupiter-12 (ЮПИТЕР-12) 35mm f2.8 L39 Mount
※ Biotar 구조 리뷰 :
2018.10.27 - [손안의 도구] - Fujinon 55mm f1.8 & 55mm f1.6 M42 m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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