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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색감

녹슨 굴뚝의 도시

※ 특정 지역의 비하 의도가 담겨 있지 않는 단순 감상에 대한 글입니다.

 직군이 제조업이고 공장이 구미에 있다보니 어쩔 수 없이 구미로 종종 출장을 가곤 한다. 초짜 때 나보다 먼저 구미에 다녀온 친구가 말하길 도시 전체가 윈도우 95의 3차원 파이프 화면보호기 같다고 했을 때 웃자고 하는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 처음 만난 공업단지의 위압은 실로 대단했었다. 장기 출장 전에는 그래도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2년 2개월이라는 시간은 본래 있던 이 도시에 대한 애정마저 앗아갈 만큼 가혹했다. 매주 월요일 새벽, 금요일 저녁 시간의 편도 300km 운전은 첫차의 심장을 도려갔고, 중부내륙의 피 튀기는 차선 전쟁은 노이로제 걸리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1년 전후로 약속되었던 마무리의 시기는 결국 2년 2개월이 되고야 말았으니 군대에 다녀온 기분마저 들었다. 부대 있던 쪽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는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지만 녹슬고 낡은 도시 곳곳의 장면들은 자꾸 뒤돌아 보게 하는 매력이 있다.

 

 워낙 사람 한 명 없고 쓸쓸한 장면을 좋아하다 보니 어쩔 때는 도시 전체가 나를 위한 놀이공원처럼 느껴졌다. 폐공장이나 낡은 철문, 녹슨 구조물이 눈부신 하늘, 화려한 여름 꽃, 푸르른 이파리와 대비되어 감성을 배가 시켜주었다. 봄이나 여름보다는 겨울의 앙상한 나무 가지가 쓸쓸함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지만 추운 겨울에는 도무지 카메라를 가지고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목성 12호 같이 주변부 화질이 급격히 무너지는 렌즈로 찍으면 눈물샘에 습기가 찬 기분마저 든다. 

 

 초저녁에서 밤이 되면 기분 탓이 분명할 쓸쓸함이 짙어진다. 역광에 강하지 않은 코팅 덕에 어디서 들어온지도 모르겠는 빛 번짐이 발생했고 보케의 빛망울은 영롱함을 잃고 뭉개진다. 초점이 맞지 않아 뿌옇게 된 부분은 당장이라도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릴 듯했다.

 

 엄청난 덩치의 공업 단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정겹고 푸근한 광경을 만날 수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움직 일 수 있는 시간이 대부분 저녁시간이어서 사진을 찍으러 다닐 수 있는 시간이 짧아 아쉬웠다. 최악의 출퇴근 길이였지만 고속도로가 막혀 돌아가는 국도 주변에는 언제나 반짝거리는 장면이 있었다. 사실 원래는 파이프 뭉치가 얼기설기 엉켜있는 삭막한 장면만 수백 장 찍어서 답답한 마음을 사진으로 표현해보려 했었다. 하지만 계속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기도 지쳐 쓸쓸함 속에 있는 아름다운 장면을 찾고 싶어 졌다. 내 나이보다 두배는 족히 넘는 오래된 렌즈에 집착하고 갈망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낡고 녹슬었지만 분명 빛나는 부분이 있기에, 단점이지만 특징이 되기에 구미라는 도시를 마냥 증오할 수 없다. 

 


사용한 렌즈 및 리뷰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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