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on EF 80-200mm f2.8 L

 캐논'백통'으로 불리는 70-200 줌렌즈는 누구에게나 끌리는 렌즈일 것이다. 시커먼 바디와 대비되는 백회색의 크고 아름다운 렌즈를 보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지갑이 열려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대다수가 그렇듯 적절한 대안을 여러모로 알아본 후에 썩어도 준치라고 '흑통'으로 불리는 오래된 80-200mm f2.8 L렌즈를 구입하게 되었다. 

 

 일단 이 렌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전용 후드가 개밥그릇 같이 생겼다는 것이다. 기능상은 큰 문제가 없겠으나 너무 못생겼다는게 큰 문제 였다. 그래서 엄마백통 호환 후드의 베이요넷 부분을 갈아내고 어거지로 끼워 넣듯이 착용하여 사용하였다. 베이요넷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후드가 돌아가는 경우가 있지만 렌즈와 끼워지는 부분에 시트지 등을 덧대어 체결력을 높여준다면 후드가 스스로 돌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추가로 삼각대 마운트에 길이가 긴 도브테일 플레이트를 달아 삼각대 마운트로 쓰거나 손잡이로 사용 했다. 

 

 

 손떨림 방지가 당연히 없어서 고감도 바디가 아닌경우 실내/야간에 삼각대 없이는 사용이 힘든편이다. 또한 USM 모터가 적용되지 않아서 생각보다 반셔터 누를 때 소리가 크다고 느껴졌고 AF속도도 그렇게 빠른편은 아니였다. 망원렌즈 답게 1.8m-∞, 3.5m-∞ 혹은 MF를 선택 할 수 있는 스위치가 있다. AF쪽에 스위치를 위치해두면 수동 초점은 작동하지 않는다. 포커스, 줌링과 포커스링의 조작감은 세월이 세월인 만큼 조금 뻑뻑한 편이였다.

 

 외관에 대한 내용을 제외하고 이미지 품질 측면에서 보자면 89년에 발매된 이 렌즈는 참 훌륭한 렌즈이다. 영어권에서는 흑통의 별명을 'Magic Drainpipe' 라고 부르고 있다. 배수관이라는게 약간의 비하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식에 비해 훌륭한 렌즈라는 의미가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렌즈구조는 Vario-Sonnar 구조와 유사하다. Sonnar 구조를 기반으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원래의 조나 구조와는 많이 달라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현대의 표준-망원 줌렌즈들은 이 Vario-Sonnar 구조를 기반으로 한 것이 많다는 정도만 짚고 넘어가보고자 한다.

 결과물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컨트라스트가 강한 편이며 색감 역시 진득하다고 유명할 만큼 채도가 높은 사진을 잘 찍어주는 편이다. 사실 컨트라스트나 색감의 경우는 후보정으로도 조정이 가능한 부분이니 어느정도 감안하고 촬영하면 될 것 같다. 올드렌즈에 근접한 연식답게 흐려진 상이 지저분한 특징을 보이는데 느낌이 옛스럽고 좋았다. 빛망울의 경우도 끝부분이 밝고 진하게 떨어지며 내부 역시 최신 렌즈들 보다는 깔끔하지 않다. 강한 빛에 의한 고스트도 자주 출몰하는 편이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러한 특징들이 오히려 장점으로 느껴졌었다.

 

 플레어는 후드를 사용하면 많이 좋아지지만 발생한다면 "작렬!" 느낌으로 발생한다. 빛갈라짐은 조리개 날수와 같은 8방향이며 모양은 깔끔하고 뚜렷하다. 

 

 고급 망원 줌렌즈 답게 80-200mm의 가변 초점거리, f2.8 고정 조리개라는 범용성이 큰 장점이다. 또한 아름다운 크기와 굵기로 인해 근거없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도 미세한 장점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가끔씩 공공장소나 사유지에서 사진찍을 때 상업적으로 사진을 사용하려면 허락을 받거나 계약을 해야한다는 제지를 받곤 했다. 소심한 마음에 '저는 그냥 돈없는 불쌍한 취미쟁이일 뿐인데요..'라고 반박을 할 수 밖엔 없었다. 한편으로는 비싸고 섹시한 백통도 아니면서 크고 아름다운 렌즈라는 가면을 쓰고 으스대고 싶었던 게 아닌가 반성을 하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이후에 50mm 렌즈에만 집착하고 탐닉하게 되면서 그저 백통을 사지 않을 이유로 남겨놓긴 했으나 사용 빈도는 현저히 떨어지게 되어 나의 손을 떠나게 되었다.